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진호 전투 (문단 편집) === 11월 29일, 죽음의 계곡 === 하갈우리 남쪽 고토리도 앞뒤로 포위되었다. 고토리에서 북쪽 하갈우리 방향으로는 도로장애물 8개가 있었고, 남쪽 황초령으로는 3개의 장애물이 설치되었다. 유선통신망은 양쪽 모두 절단되었다. 16 km 남쪽에 있던 진흥리에서도 적이 목격되었다. 고토리에는 해병 1천 5백 명, 육군 1천 명이 있었다. 주 전력은 1연대장 루이스 풀러 대령의 지휘 아래, 앨런 슈터 중령의 2대대, 칼 시터 대위의 3대대 G중대, 찰스 펙캠 대위의 미 육군 31연대 B중대,[* 31연대 2대대에서 E중대 대신 3번째 소총 중대가 되어 함께 맥클린 부대에 들어갈 예정이었는데 11월 28일에 먼저 도착했다.] 더글러스 드라이스데일 중령의 영국 해병 41특공대이며, 정오경 해병 전차대대 D중대가 도착했다. 29일 오전 9시 45분. 고토리에서 하갈우리까지의 보급로를 개통하기 위해 드라이스데일 중령의 지휘 아래 3대대 G중대, 31연대 B중대, 해병 특공대, 사단본부대 등 총 9백 명에 차량 11대로 구성된 돌파부대가 출발하였다.[* 영미 해병대가 연합 작전을 벌인 것은 이때가 사상 2번째였다. 첫 번째는 1900년 중국에서 일어난 [[의화단의 난]].] 이미 중공군은 능선마다 우글거려 드레스데일 부대는 출발과 동시에 중공군 제20군 60사단 179연대에게 엄청난 양의 집중사격을 받았다. 정오가 되어도 불과 3 km밖에 진격하지 못하여 브루스 클라크 해병 대위의 해병전차 D중대(퍼싱전차 29대)를 추가로 배속받아야 했는데, 결과적으로 이것이 패착이 된다.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방어력이 약한 트럭과 지프는 신속히 이탈해서 진격해야 피해를 최소화하는데, 전차부대들이 대응 사격하느라고 [[길막]]하는 바람에 연합 해병대는 그때마다 돈좌된 채 포위 사격을 받아 절단 난 것이다. 오후 4시 30분,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더글러스 드라이스데일 중령은 하갈우리에 있던 스미스 장군에게 "이 위험한 돌파를 계속 해야 하냐"라고 무전으로 물어보았다. 아마도 스미스 장군 본인에게 제일 어려운 순간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증원부대가 오지 않으면 사령부가 적에 손에 떨어질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스미스 장군은 결국 '''"어떠한 희생이 있더라도 반드시 돌파하라!"''' 하고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선두 부대가 드디어 하갈우리와 고토리 중간([[부성역(장진선)|부성역]]과 [[상평역(장진선)|상평역]] 사이)에 도착했을 때, 하필이면 탄약차에 박격포탄이 명중하여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중간 부분의 길이 끊겼고, 선두 부대[* 해병 G중대, 해병전차 D중대, 영국 41해병특공대]는 미친 듯이 진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국 이 탄약차 때문에 후속 부대[* 영국해병특공대 60명, 육군 B중대, 해병사단본부대.]는 중공군의 총탄 세례를 이겨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 남겨져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 이러한 필사의 돌파로 증원된 병력은 약 4백여 명뿐이었다. 겨우 이 정도의 병력을 증원시키기 위해 대략 150명이 전사, 150명이 부상, 포로 160명,[* 육군 100명, 미 해병 40명, 영국해병특공대 20명.] 141대 차량 중 75대 파괴라는 큰 손실을 감수해야만 했다. 간신히 하갈우리에 도착한 드라이스데일 부대[* 해병 G중대 2/3, 영국해병 41특공대 등 보병 3백 명과 해병전차 D중대]는 곧바로 10군단 공병대가 지키는 이스트힐로 올라가 방어 전투에 투입되었고, 훗날 드라이스데일 중령은 자신이 지나갔던 이 계곡에 ''''Hellfire Valley(지옥불 계곡)''''이란 이름을 붙였다. 한편 남겨진 후속부대는 4토막 난 채 곳곳에서 절망적인 방어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가장 북쪽에는 10군단 연락장교 존 맥로린 해병 소령이 지휘하는 135명이 있었고, 250m 남쪽에 육군 B중대, 50m 아래 해병 사단공보관 마이클 카프라로 대위가 포함된 약간 명, 100 m 아래 사단 차량수송관 헨리 실리 소령의 약간 명이 있었다. 모두 합해 380명 정도이며 1 km에 걸쳐서 흩어져 있었고 상호간 무전연락이 되지 않았다. 밤이 깊어오고 사방에서 나팔 소리가 불어왔지만, 해병대는 방어진을 편 채 항공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다음날까지 버틸 결심으로 결사 항전하였다. 이때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중공군이 항복하라고 하자, 이 말을 전해들은 맥로린 해병 소령은, >"중공군의 항복을 접수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전하라!" >"그리고 그들에게 [[제네바 협약]]에 따라 대우해 주겠다는 말도 전하라. 토바르, 물론 중공군이 그 말을 비웃을 거라는 것을 알아.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그 말을 전해. 따뜻한 음식을 먹여주겠다는 말도 잊지 말고."[* 단 중국 쪽 책은 뉘앙스가 다르다. 왕수쩡의 『한국전쟁』에는 【매클로린 소령은 떨리는 입술로 물었다. "투항하러 왔는가?" 중공군이 말했다. "나는 에서 보낸 사절이다. 우리는 당신들이 소수 인원을 파견해 중상자를 고토리로 후송하는 데 동의했다. 조건은 남은 인원이 반드시 우리에게 항복하는 것이다." 매클로린은 하늘을 보면서 말했다. "생각해 보겠다."】라고 하였다.] 해병 헌병대 길레르모 토바르 병장이 이 메시지를 갖고 [[한국인]] 통역을 대동한 채 교섭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3차에 걸친 교섭을 하였는데, "무기만 내려놓으면 부상자들을 고토리까지 보내주겠다"라는 말에 속아 항복하고 만다.[* 이들 중 일부는 12월 7일 영미 포로를 돌려준다는 중공군의 제안에 폭스힐의 영웅 7연대 F중대가 직접 가서 찾아왔다. 중대라고 해봤자 20명밖에 안 남았지만 이들은 하갈우리 쪽으로 다시 역주행하여, 약속된 장소에서 미 육군 병사 수십 명과 영국 해병특공대원 2명을 인수해왔다.] 그나마 후방에 있던 2개 그룹은 후퇴에 성공하였다. 이 중에서 육군 31연대 B중대는 장진호 동쪽의 페이스 부대 증원이 예정된 부대였다. 그러나 전사 1백 명에 실종/부상자 19명이 발생하여 더 이상 전투가 불가능했다. 오후 3시경 뒤늦게 증원을 위해 참가한 해병 전차대대 B중대는 어느 정도 진격하다가 극심한 저항에 돈좌되어 하룻밤 원형 방어하다가 다음날 고토리로 복귀하였다. 한편 29일 아침 하갈우리에 있던 해병대 스미스 사단장은, 10군단 사령부로부터 유담리의 1개 연대를 이동시켜 장진호 동안에 고립된 육군 7사단 페이스 부대를 구출하고, 하갈우리와 고토리 사이의 도로를 개통시키라는 메시지를 무선으로 하달받았다. 능력 밖의 일이라 명령은 무시되었고, 심지어 하갈우리를 방문한 육군 7사단장 데이비드 바도 해병대의 의견에 동의하였다. 하갈우리의 호즈 부사단장은 어떻게든 장진호 동안의 부하들을 구출하려고 노력했지만 병력이 없었다. 해병대는 내가 죽게 생긴 상태라 육군을 도울 여력이 없었다. 단적으로 덕동고개에 포위된 F중대의 위기는 심각하였다. 이날 아침 2인승 헬리콥터가 덕동고개에 착륙해 무전기용 전지를 전달해 드디어 무전기를 사용하여 포병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지만, 그래봤자 숨 넘어가는 중환자 상태였다. 해병대 7연대의 2개 중대, 5연대 1개 중대를 동원하여 혼성대대를 만들어, 덕동고개의 F중대를 구원한 후 쭉 밀고 내려가 하갈우리까지 진출하는 작전을 시도하였다. 이 용감한 부대는 출발한 지 단 몇 분 만에 도로 양쪽에서 빗발치는 기관총 사격에 그냥 후퇴해 버렸다. 애초 10군단의 작전 계획은 육군 3사단이 고토리와 [[함흥]] 사이를 책임지는 것이었다. 이에 해병대에서는 "계획대로 육군 3사단이 고토리 후방의 진흥리를 인수해주면, 진흥리에 있는 1연대 1대대를 고토리로 올리겠다." 했다. 그러나 이 요청은 거부되었고, 이 날 정오 알몬드 군단장은 함흥/흥남 방어를 위해 10군단 병력을 집결하라고 하였고, 9시간 후에는 철수계획을 제시하였다. 이제 후퇴밖에 남은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해병대 스미스 장군은 '기존 유담리 북쪽은 5연대가 방어하고 남쪽은 7연대가 방어하는 작전에서, 5연대는 유담리 전체를 방어하고 7연대는 하갈우리까지 도로를 개통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한편 장진호 동안 육군은 그냥저냥 버틸 만 했다. 이날 오후부터 약간의 공중 보급이 시도되어 그 중 일부가 진 내로 떨어져서 식량과 각종 탄약을 보급받았다. 또한 해병항공대가 지속적으로 네이팜탄, 로켓포, 기관총을 사용해서 주변 중공군을 공격해줬다. 주간에는 항공 폭격이 무서워 숨어있던 중공군이 밤에 공격하는 게 정상이지만, 이날은 월광이 양호하여 밤에도 공중 폭격을 하였다. 중공군은 미군 방어선 밖에 몰려있어서 효과 만점이었다. 또한 야간에 중공군은 거세게 공격해왔지만 다시 한 번 대공포들이 불을 뿜어 방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날 밤에 너무 추워서, 미군 병사 하나가 자신의 개인호에서 앉은 자세로 얼어 죽었다. 한편 후동리의 전차 중대는 현재 15대의 76밀리포 전차와 105밀리포 전차 2대를 보유 중이었다.[* 76밀리포 전차 4대는 전날 1221고지에서 파괴. 1대는 부사단장이 타고 감.] 그 외에는 57포병 근무포대(100명가량), 31연대본부와 분부중대, 근무중대, 공병 1개소대, 중박격포중대 분견대, 의무중대 분견대가 있어 보병 역할을 할 병력이 거의 없었다. 이들이 북쪽의 페이스 부대와 연결하기 위해서는 전날 공격했다 실패한 1221고지를 탈취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전차 12대와 [[행정병]] 30~70명, 박격포 1문을 이끌고 1221고지를 아침 8시부터 4시간 동안 공격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항공통제관이 없어 효과적인 항공 지원을 받지 못했고, 포병 지원은 아예 없었다. 이들은 '30일까지 후동리에 있다가 하갈우리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함께 있던 연대 본부는 통신이 두절된 상태였지만, 전차 중대는 부사단장 호스 준장이 전차 1대를 얻어 타고 하갈우리로 후퇴한 관계로, 전차 무전기를 이용해 통신이 가능하였다. 전날 맥클린 대령이 그토록 기다리던 31연대 2대대는 아직도 [[함흥차사]]였다. 2대대는 E중대가 빠져 감편된 상태로 이날 늦은 오후에야 '''[[함흥]]'''과 하갈우리 중간의 마전동으로 이동하라는 지시를 받고 병력은 철도로 수송되고, 10군단에서 지원된 차량으로 물자를 이동시켰다. 그런데 군단본부의 실수로 2대대의 물자를 실은 군단 지원 차량들이 차량집결지에서 해산되어 버렸다. 그 바람에 2대대는 하루 종일 손 빨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30일 아침에 북쪽으로 이동하였지만 중공군 공격을 받아 고토리 3마일 전 지점에서 돈좌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하갈우리의 알몬드 소장은 불 같이 화내며 "즉시 진격하라"라고 하였다. 그러나 레이디 중령의 2대대는 미적대다가 저녁에야 이동하였고, 자정 무렵에 부비트랩이 터지자 그대로 전면 도주하였다. 레이디 중령은 슬쩍 숨었다. 이 과정에서 적의 공격은 없었고, 미군의 반격 역시 없었다. 이후 병력을 수습하여 다시 이동하였고 레이디 중령도 슬그머니 나타났다. 그러나 고토리 남쪽 2마일 지점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받자 선두 부대는 차량을 버리고 그대로 고토리로 들어갔고, 대열 후미는 응사하다가 역시 차량을 버리고 아침 9시쯤 고토리로 들어갔다. 이때 버려진 차량들은 5일까지 그냥 그 자리에 방치되었다. 그런데 고토리 북쪽 도로는 중공군이 장악하고 있어 더 이상 진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냥 거기서 장진호 전투가 끝나는 12월 12일까지 눌러 앉았다. 32연대 2대대는 미 해병대 1연대에 배속되어 고토리 방어진지에 책임 구역을 부여받았으며, 레이디 중령은 고토리에 있는 44개 부대 소속의 미 육군 1,800명을 통제하는 일을 맡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